‘오징어 게임’에 그려진 자본주의와 기독교 (오피니언/11-10-2021/에포크타임스 한글판)
‘오징어 게임’에 그려진 자본주의와 기독교
[출처] 에포크타임스 한글판 - Kr.TheEpoch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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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
2021년 11월 10일
업데이트: 2021년 11월 11일
어두운 잔혹동화다. 글을 쓰려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30개월 된 아들이 가까이 오는 걸 막아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런 영화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를 강타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아 무척 반갑기는 하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게임이다. 나는 소위 ‘암행어사’가 되기도 전에 술래들을 깽깽이로 씨름해 넘기곤 했고 오징어 머리의 삼각형을 밟아 게임을 끝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와 한 편이 되고 싶어 했다. 추억의 게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반가운 마음에도 가슴 한쪽엔 불편함이 남는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바로 영화가 줄곧 조롱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오징어 게임은 봐 선 안될 영화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불편하다. 선혈이 낭자하는 어른들의 잔혹동화를 굳이 좋아서 찾아볼 필요는 없겠지만 교회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화적인 현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단절된 공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자꾸 내게 안기려는 어린 아들도 언젠간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건강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영화가 불편한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을 자본주의의 냉혈함을 고발하는 영화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황동혁 감독이 정통 PD계열이 장악해 온 서울대 사회대 출신이고 ‘1%가 99%를 지배하는 경쟁사회에서는 모두가 약자, 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의 인터뷰를 고려하면 아마도 그런 듯하다. 그런데 이런 해석과는 정반대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오징어 게임의 VIP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공산당을 닮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는 중공의 장기적출 문제도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재미있는 반전이다.
자본주의는 정말 인정머리도 없는 냉혈한 시스템인가? 자본주의에 대한 오해는 이번 기회에 좀 바로 잡았으면 한다.
자유시장 사상에 대한 오해 : 아담 스미스는 소수의 착취를 지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자유시장에 대한 악마적인 왜곡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탐욕과 이기심, 약육강식, 특히 성경이 언급하는 맘모니즘(물신주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필자도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창시자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도 정작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용어는 1850년대 사회주의 진영에서 자유시장 사상을 공격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정점엔 1867년, 칼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론(Das Kapital)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행복하고 부유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직접 인용한 글이다. 사람들이 너무도 오해하고 있지만 아담 스미스는 결코 극단적인 탐욕과 방탕을 지지하지 않았다. 막스베버를 언급하기 이전부터 아담 스미스는 기독교 윤리에 기반한 시장 제도를 구상했다. 그는 특권과 탐욕, 독점과 세금우선권, 로비집단을 경계했다. 중상주의 체제하에서 소수의 기득권에게만 인정되던 경제적 자유를 국민 대다수에게 허락하고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드러난 그의 견해를 종합하면 도덕적 범위 내에서 개인에게 자유로운 시장체제를 구축하면 각자의 자유로운 이익추구 활동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 추구는 도덕적 한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자율적인 시장을 보호할 때 빈곤의 해결을 포함한 사회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중을 돕는 최선의 길이 바로 자유시장 경제라는 것이다. 그는 결코 1%가 99%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 바탕을 둔, 돈이면 다 되는 물질 만능의 이론으로 왜곡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반시장주의자들의 오랜 왜곡이다.
많은 사람들이 냉혈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개선하겠다면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착한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를 강변한다. 그런데 한 가지 명확히 할 것은 이미 그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가 말한 자유시장 사상의 본질이고 그의 철학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냉혈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시작부터 이미 자본주의는 따뜻한 것이었다.
그의 이론엔 세부적인 오류와 문제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필자에게 그의 사상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마르크스와는 달리 인간이 모두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신뢰했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죽여야 살 수 있는 제로섬 게임
오징어 게임에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자신이 살고 상금을 향해 나아간다. 어릴 적 친구도, 지금의 파트너도 경쟁 상대일 뿐이다.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어야 하는 냉혹한 시스템.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특별히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렇게 냉혹한 것이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자유시장 시스템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었다. 반면 그가 비판한 중상주의는 경제체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이해했다. 중상주의자에게 한 사람의 이익은 다른 사람의 손실을 의미했고 공익이나 공공재는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정치경제란 결국 한 편의 이익을 위해 다른 편에 해를 가하는 행위로 인식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러한 중상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시스템을 그렸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공공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된다고 보았다. 국부론으로 번역되는 그의 저서 ‘Wealth of Nations’는 한 국가의 부의 증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부를 증진,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갈망한 제목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제작 과정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시장의 혁신을 통해 나온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시장의 혁신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드라마였다. 넷플릭스는 영화·드리마 시장의 혁신이다. 1997년 DVD 대여점으로 시작한 넷플릭스는 DVD를 온라인으로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2000년엔 정기구독 방식을 도입하고 정기구독자에게 매월 3장의 DVD를 대여했다. 2007년엔 스트리밍 서비스에 뛰어들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콘텐츠 확보가 관건인데 영화제작사로부터 라이선스가 쉽지 않았고 수익이 나면 라이선스 비용을 올리기 일쑤였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넷플릭스는 2011년 자체 콘텐츠 제작을 시작한다.
영화·드라마는 전통적으로 투자사와 배급사의 거대한 힘 아래 눌려 있는 사업이다. 넷플릭스는 이런 산업구조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투자사, 배급사, 제작사, 제작자, 감독 등으로 얽혀있는 영화제작 생태계에서 넷플릭스는 투자사, 배급사, 제작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직접 영상을 창작하는 크리에이터에게 많은 자율성을 보장한다. 유능한 감독들이 넷플릭스로 진출하는 이유다. 넷플릭스 강점인 디지털 역량을 이용해 세계 각지에 있는 영상 제작팀들을 지원하고 그렇게 제작된 영상을 세계 180개국에 동시에 배포하는 혁신을 이뤘다. 영상 산업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영화 제작보다는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시장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드라마 방식을 차용한 것도 사업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적인 혁신이다.
황 감독이 10년 전에 쓴 오징어 게임 시나리오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건 시장의 변화와 고객의 필요에 민감하게 대응해 온 넷플릭스의 혁신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시장의 혁신으로 빛을 보게 된 작품이 자유시장 제도를 비판하는 역설적인 현실을 보고 있다.
시장을 타락시킨 건 누구인가?
자본주의를 냉혈한 제도로 이해하는 것은 신고전경제학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하고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며 소비자는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가정에 따라 경제이론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윤 극대화는 경제학에 수학을 도입한 신고전경제학자들의 가정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자유시장 사상과는 명백히 거리가 있다. 개인의 이익 추구는 도덕적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가장 중요한 그의 기본적인 정신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 사상은 인간의 존엄과 책임 있는 자유, 진실에 기반한 사회라는 보편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시장은 수단이다. 완전하지도 않다. 하지만 유용한 수단이다. 인간의 역사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한 경제 제도는 자유시장밖에는 없다. 하지만 시장이라는 도구도 인간의 존엄과 책임 있는 자유, 진실의 가치를 담아내지 못하면 그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시장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보수의 정신을 쓴 러셀 커크는 시장에서 놀라운 혁신을 이뤄 내 성공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쟁에서 뒤처진 평범한 사람들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침해받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보수의 정신임을 명확히 했다.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은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본다. ‘보수주의’를 일반에 설명하는 길이 아직은 조금 멀게 느껴진다. 시장이 타락하는 것은 보수·진보를 떠나 기본적인 시장의 정신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 드러난 반기독교 정서의 근원
오징어 게임엔 반기독교 정서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마도 황 감독이 경험했을 법한 기독교에 대한 불쾌감이 대사에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영화 속에 비친 속물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지나친 과장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현재 교회가 받고 있는 평가의 실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평가를 떠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지전능한 인격신을 전제한다면 사회적인 부조리와 모순들을 허락한 그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그런 존재가 나를 무한히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개인적인 고통과 불행을 방치하고 절망 속에 빠진 나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그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오히려 증오로 발전하기 쉽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교조화된 교리와 권력이 되어 버린 교회 그리고 그 안의 부패, 또 세상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기독교인들을 보게 되면 종교란 결국 나약한 사람들의 도피처이고 자신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일종의 환각과 주술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종교는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고 인간을 좀스럽게 만드는 몹쓸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독립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과 이웃의 불행을 최소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인간의 성취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종교는 인간이 이런 자유와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종교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키고 미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돕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적 휴머니즘, 세속적 인본주의의 결론이다.
오징어 게임의 일관된 기독교 조롱은 단순한 냉소와 조롱일 수도 있고 인간 해방을 위한 감독의 처절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
게임을 설계한 오일남의 대사다. 일남은 죽기 전 자신을 찾아온 기훈에게 창밖에서 죽어가는 걸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것인지 마지막 게임을 제안하며 그에게 묻는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 영화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화면 캡처
무신론적 휴머니즘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세우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론과 사회진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여기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람을 죽이면 왜 안될까? 오징어 게임을 보며 가장 불편했던 건 헌신짝처럼 쓰러지고 베어지는 사람들의 유혈이 낭자한 장면들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을 죽이면 도대체 왜 안될까?
상대주의자에겐 살인하면 안 된다는 것도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다. 실존주의자는 자신의 실존·생존을 위해 모든 살인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인간이 왜 존엄한가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 없다. 윤리와 도덕은 인간이 만든 관습일 뿐이고 선과 악의 구분도 근원적으로 무의미하다.
인간 이성에 기반해 설계한 무신론적 유토피아는 가치 상대주의라는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절대적인 기준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토대 위에서 유토피아를 지향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잉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휴머니스트를 자처했고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를 지지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그는 소련의 인권 유린과 학살을 정의로운 폭력이라 불렀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나치는 계급투쟁에 기반한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으로 대체한 또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을 말하면서도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설정한 공동체의 이상에 미치지 못한 모든 개인들을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모든 유형의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인본주의자에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나약하고 개선해야 할 존재다. 기독교 세계관에 강하게 뿌리내린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달리 가치 상대주의에 기반한 현대 서구의 자유주의는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평등과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며 복지정책을 빌미로 강력한 집단주의적 중앙집권 체제를 옹호한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뢰한다. 아니 신뢰해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설계한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닌 교화의 대상일 뿐이다. 때론 그들을 제거하거나 그들의 입을 막아버려도 어쩔 수 없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이 추구해 온 유토피아는 역사 속에서 계속 실패했다. 휴머니즘을 내세우며 학살을 자행하거나 정당화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미 니체와 같이 하나님을 죽여버린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반복적인 모순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일을 겪고도···
기독교인들을 위한 첨언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징어 게임을 꺼린다. 피 튀기는 영화를 굳이 좋아서 찾아볼 필요는 없다. 영성에 그리 도움이 될만한 영화는 아니다. 필자처럼 굳이 찾아서 본 사람들은 돈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심오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새길 수도 있다. 또는 교회라는 제도 속에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지금 교회의 모습을 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현상과 그 이면에 내재된 사상의 지형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이 시대 학문은 하나님과 도덕을 배제한다. 그것이 ‘과학’이라 가르친다.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달리, 기독교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현대의 자유주의는 가치판단을 포기함으로써 상대주의적 자기 분열에 빠져 방황하고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무신론적 상대주의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와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마르크스주의를 방법론으로 차용했다. 그리고 인종, 성별, 약자, 소수자 같은 집단의 정체성이 마르크스의 계급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여 집단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교회는 이런 현상에 대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관용과 사랑을 말하면서 이면의 본질을 간과하고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빨려 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성별 구분 해체를 정당화하는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학문적, 사상적 배경이 반영된 하나의 사례다.
마르크스는 그의 사상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포스트모더즘은 과학과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동한 것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 마르크스주의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인본주의자들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일 것이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긍정적인 기회로 수용하려는 시도도 존재했다. 이성을 절대화하는 모더니즘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실은 그런 희망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6색 무지개 휘장을 두른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배회하는 모습을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악이 관용과 사랑이라는 백도어를 통해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우려된다.
모더니즘을 표방하건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건 무신론적 인본주의는 우리의 답이 아니다. 범신론적 인본주의도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상과 부정하는 사상의 싸움이다. 차별금지법으로 대표되는 이 세계사적 싸움의 중심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출처] 에포크타임스 한글판 - Kr.TheEpoch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