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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국민일보] 미국 뉴저지 크리스천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by 킹덤네트워커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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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넷 뉴스> 기사 사진입니다.

 

미국 뉴저지 크리스천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역경의 열매][국민일보]
2005-04-07 05판 28면 1552자 문화

기독교육 공동체 ‘킹덤 드림’을 꿈꾼다

나는 꿈꾸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는 꿈과 비전을 갖고 살와왔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너무나 인본주의적이었지만 열심히 건강하게 살았다. 1971년 대한해운공사 뉴욕지점장으로 미국땅을 밟은 이후 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적셔진다. 나의 젊은 날은 꿈과 땀,눈물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이후 나의 꿈은 180도 달라졌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던 나는 예수를 만난 이후 ‘킹덤 드림’(Kingdom Dream)을 이루기 위해서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조금이라도 쓰여지는 삶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나는 기독교 엘리트 학교를 만들어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주님의 일꾼들을 길러내고 싶었다. 선교지로 나가고도 싶었으나 가족을 떠나 홀로 먼 선교지로 가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아침이슬 같은 주님의 일꾼들을 복음으로 길러내서 주님의 자녀로 전 세계에서 일하게 하는데 일조하기 원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은 겨자씨 같았던 내 꿈이 이제 어느 정도 열매를 맺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 동부 뉴저지 외곽 5만여평에 설립한 ‘뉴저지크리스천아카데미’내에 지난해부터 미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뉴저지 유나이티드크리스천아카데미 고등학교’(NJUCA)가 개교했기 때문이다. 미 동부지역에 한인이 운영하는 최초의 기독교 사립 고등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1988년 기독교 수양관인 뉴저지크리스천아카데미를 시작할 때부터 16년만에 이뤄진 꿈이다. 뉴저지 유나이티드크리스천아카데미 고등학교는 지성과 영성,감성을 두루 갖춘 크리스천 리더를 키우는데 역점을 두고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현재 8명의 훈련된 미국 교사들이 23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직은 학생 수가 많지 않지만 올바른 신앙과 기독정신으로 소수 정예 엘리트들을 교육시키는 있다. 이곳은 성경을 비롯해 영어 수학 과학 제2외국어 역사 등을 배우는 미국식 정규학교로 교사와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교육 공동체를 이뤄나가고 있다. 8명의 미국 정교사들은 모두 독실한 신앙인으로 크리스천 교육에 대한 주관이 뚜렷하다. 내가 학생들의 학력 증진을 위해서 한국식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은근히 꺼냈더니 교사들은 “아이비리그에 들어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제대로 된 기독교 정신과 신앙을 갖고 사회로 나가는 것”이라면서 “올바른 인성이 갖춰진 바탕 위에 지성이 가미될 때 사회에 기여하는 크리스천 일꾼이 길러진다”고 강조했을 정도이다. 교사들은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낸다. 그렇다고 가르치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교사들은 철저하게 학생들의 성적을 관리하고 있다. 모든 수업이 1대1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학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교육이 올바로 이뤄지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사실 이 학교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기막힌 역사하심이 있었다. 기적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 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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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 크리스천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2)

“주님을 닮은 삶 살겠다” 풍요 내던져

[국민일보] 2005-04-08 05판 31면 1662자 문화
어느날 아카데미에 편지 한 통이 잘못 배달되어 왔다. 인근의 미국 사립고교인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로 가야 할 편지가 집배원의 실수로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 배달된 것이다. 당시까지 뉴저지 인근에 크리스천 사립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그제서야 우리와 이름이 비슷한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존재를 알게 됐다.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서 바로 전화를 걸어 그 학교의 스태프와 만남을 갖게 됐다.

 

그 학교는 기존의 학교제도에 실망해 사명감을 갖고 홈스쿨을 해오던 몇 명의 기독 교사가 뜻을 모아 만든 학교였다. 미국 침례교회를 빌려서 세운 기독고등학교였다. 나는 무엇보다 그곳의 교사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모두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철저한 기독정신에 입각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마침 그 학교는 열악한 시설 때문에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수 차례 만남을 갖고 주님 안에서 한 뜻을 품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만남을 통해 나는 학교 시설과 재정적인 측면을 담당하고 그 학교는 교사와 커리큘럼을 제공키로 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뉴저지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문을 열게 됐다.
“할렐루야!”
기독교 학교 설립은 오랫동안 간직한 나의 꿈이었다. 연세대 법대와 대학원을 나온 뒤 한양대 교수로 상법을 가르치던 시절부터 학교 설립의 꿈은 내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는 철저한 하나님의 교육을 시키는 기독학교를 만들기 위해 아내와 새벽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1988년 뉴저지에 수양관을 시작하면서 ‘크리스천 아카데미’라고 이름 지은 것도 학교 설립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수양관 시설만이라면 굳이 아카데미란 말을 넣을 필요가 없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뉴저지에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만든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나는 골프를 열심히 치며 편안한 삶을 추구했었다. 나는 주재원이었고 아내는 소아과 의사였기 때문에 우리 미국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미국생활이 안정되면 될수록 무언가 가슴속에는 타는 갈망이 있었다. 늘 크리스천으로서 주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언제나 세상에 다리를 뻗고 살았다.
그런 가운데 나는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모든 환경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강한 결심을 하게 됐다. 그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바로 믿기 위해 되도록이면 많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번잡한 뉴욕과 뉴저지에서 한두 시간 벗어나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며 그분과 교제하며 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장소를 물색하던 가운데 청소년센터와 유사한 기관이 운영하던 버려진 땅을 발견했다. 지금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세워진 장소였다. 재정난으로 4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던 낡은 건물과 수영장,잡초가 무성한 5만여평의 대지가 마음에 들었다. 앞을 생각지 않고 무조건 그 땅을 구입했다. 학교 설립에 대한 구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재정적으로 만만치 않았다. 일단 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그만한 돈이 없었다. 1988년부터 긴 시간 땅을 일구고 나무도 심으며 건물을 세웠다. 지금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모든 곳에는 나의 숨결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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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3)

큰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주님 원망

[국민일보] 2005-04-11 05판 35면 1578자 문화
뉴저지의 집에서 아카데미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매일 왕복 3시간의 거리를 운전하며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일궈나갔다. 나는 일단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수양관으로 사용키로 했다.
당시 나는 교회 외에는 다른 기독교 기관과 접촉이 없었다. 교육사업 외의 일반 기독교 사역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를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목회자들에게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뉴저지 인근은 물론 먼 지역의 한인 목회자들이 아카데미에 찾아와 재충전 시간을 가졌다. 아카데미를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교회 성도들을 보냈다. 일반 성도들도 찾아오면서 수양관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되었다. 한국의 예수원과 같이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미주 동부지역 동포들의 영적인 안식처가 됐다. 기도하러 오는 성도들을 맞으며 큰 행복을 느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나는 아카데미에 새로운 건물과 기도처를 만들었다. 숙소도 건립해 장기 생활도 가능하게 했다. 아카데미를 시작한 이후 17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수양관을 찾았다. 내가 섬길 수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격했다. 때로는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도 찾아오셨다. 밤 늦도록 그들의 신앙과 사역을 들으면서 섬김을 위한 새로운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기쁨과 만족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시작하고 3년이 지났을 때 나와 우리 가족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다. 큰아들 한준이가 여행중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앞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아들의 죽음은 어떤 위로로도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아픔이었다. 한준이는 명문 MIT 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미국 굴지의 컴퓨터 회사에서 근무하던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로스앤젤레스 지점장으로 일하던 중 영국에 있던 친구와 스페인에 여행을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한준이를 놓고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모른다. 너무나 착하고 건강한 정신을 지닌 아이였다. 장례식에는 이름도 몰랐던 한준이의 친구들이 알래스카와 하와이 등 먼 곳에서 찾아왔다. 모두 한준이로부터 사랑의 도움을 받은 친구들이었다. 슬픈 가운데서도 아들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착한 아들을 데려가신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도저히 아들의 죽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럼없이 살려고 애쓰면서 나름대로 주의 일을 감당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불모지에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세우고 주의 종들을 섬기기 위해서 사심없이 일했었다. 나는 “왜 사랑하는 아들을 이렇게 빨리 데려가셨나요?”라고 외치며 욥과 같이 절규했다. 많은 분이 욥기 말씀으로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욥처럼 의인도 아니었다. 나 때문에 아들이 희생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계속 운영할 자신이 없어졌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아카데미를 넘길 생각을 했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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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4)

“아들 죽음도 하나님 결정이셨으니…”

[국민일보] 2005-04-12 05판 31면 1687자 문화
아들의 죽음을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시 한 번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아버지!”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지불하고 싶었다. 그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침마다 한준이가 들어와 나를 껴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아카데미 사역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뉴저지 교회협의회 목회자들에게 아카데미 운영을 부탁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다양한 목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교회협이 아카데미를 맡으면 의견이 분분해 운영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다른 사람들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인수를 거부했다.
나는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매달렸다.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뜻을 간구했다. 처절하게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기도 가운데 주님은 나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셨다. 갑자기 요한복음 9장 3절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내 마음을 꿰뚫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내게는 존재 의미를 느낀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하나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고통이란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회다. 한준이 몫까지 살아야 한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들의 죽음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었다. 그것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나의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나는 철저히 회개했다. 아내의 성숙한 믿음도 내가 새롭게 힘을 얻는 데 도움을 줬다. 아내는 “여보,하나님이 지난 27년동안 착하디 착한 아들을 주셨음을 감사해요. 27년동안 한준이 때문에 모두 즐거웠잖아요. 결국은 모두 본향인 하늘나라로 가잖아요. 한준이가 살면서 받을 더 큰 고통을 하나님이 미리 거둬가신 거예요.”
아내 말에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한준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하늘나라만 바라보기로 했다. 어느 순간 운명처럼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선한 싸움을 싸웠으니…’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역도 열심히 하기로 했다.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얻기 위해서도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역을 해나가기로 다짐했다. 윤동주 시인 역시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 노래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간구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좌절했다 회복된 나는 본격적으로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먼저 부족한 시설을 확장하는 데 노력했다. 무엇보다 예배실을 최우선적으로 짓고 싶었다. 아들을 기리기 위해 예배실을 ‘조셉홀’(Joseph Hall)이라고 이름붙이기로 했다. 그러나 수양관 수입만으로는 현상 유지도 힘든 상황에서 새로운 건물을 건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께 날마다 간구했다. “이 일은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저를 써주십시오.” 놀랍게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질을 채워주셨다. 특히 소아과 의사인 아내는 나의 가장 큰 조력자였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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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5)

‘사랑의 빛’ 늘수록 번창한 믿음 사역

[국민일보] 2005-04-13 05판 35면 1576자 문화
40년 이상을 함께 산 아내 신전식 장로는 내 인생의 완벽한 동반자였다. 연세대 동기인 김원기 국회의장의 소개로 처음 아내를 만났다. 어진 성품의 여인이었다. 김 의장이 당시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신전식씨는 ‘성녀’야. 잘 모셔야 해” 살아가면서 나는 아내가 ‘성녀’(聖女)가 아니라 ‘석녀’(石女)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아내는 착하고 어질었지만 때론 돌과 같이 미련하고 우직하게 인생을 살아나갔다. 희생하면서도 조금도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여인이다.
의학을 공부한 아내는 뉴저지 한인 밀집지역인 포트리에서 소아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의사보다 수입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내는 내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병원에서 버는 돈의 대부분을 아카데미에 쏟아부었다. 한국에서는 교수의 아내로,일본과 미국에서는 주재원의 아내로 편안한 삶에 익숙할 만했지만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믿음의 야성이 있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한 기관이었지만 출석하는 뉴저지연합감리교회 이외의 교계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내게 재정 지원을 할 만한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뭉칫돈이 필요할 때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돈이 필요해.” 아내는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채워줬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하루 세끼만 먹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는 자족 의식이 있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과 같이 살고 싶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같은 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큰아들이 떠난 뒤 둘째아들과 함께 아카데미 사역을 하고 싶었으나 뉴욕에서 프리랜서 방송PD로 활동하고 있는 둘째아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 둘째아들은 아프리카 에이즈의 실태를 파헤친 다큐멘터리로 에미상을 수상할 정도로 미국 방송계에서 인정 받는 방송인이다.
아내와 내게는 이제 필요한 것이 별로 없다. 머무를 집이 있기 때문에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내가 다시 아카데미 사역을 시작하며 시설을 확장하려고 하자 아내는 수입이 생기는 대로 모두 아카데미를 후원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헌신을 알게 된 많은 성도가 갖가지 생활도구를 지원하고 헌금했다. 모두 아무 조건없이 도왔다.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면서 나는 아카데미 일에 더욱 몰두했다. 1993년에 예배당인 조지프홀을 완공했다. 이후 주차장을 고치고 농구대를 놓고 테니스장도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50여명이 장기 숙박할 수 있는 ‘아멘하우스’를 건축했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와 유사한 야외 공연장도 아담하게 만들었다. 노천극장을 만들면서 생각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언덕에 간단히 침목을 놓고 계단식으로 만들면 되겠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100트럭분 이상의 흙이 필요했다. 처음에 그같은 사실을 알았더라면 만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같은 노력들을 거쳐 황량한 벌판 같았던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점차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해갔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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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6)

황무지에서 아름다운 아카데미 탄생

[국민일보] 2005-04-14 05판 32면 1602자 문화
요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 오시는 분들은 학교가 무척 아름답다고 평한다. 아카데미의 변천사를 모두 알고 있는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빙그레 웃는다. 황무지와 같았던 땅이 아름다운 동산이 되기까지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재미있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려운 생각부터 주시지 않는다. 쉬운 생각부터 주신다. 그래서 쉽게 일을 시작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러면서 중간에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도록 환경을 몰아나간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 낙담해 있을 때 힘을 주신다. 언제나 마무리는 하나님이 해주신다. 그같은 과정을 통해서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의 뜻을 체험하도록 한다.
아카데미 사역도 처음에 별것 아닌 것 같아서 쉽게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건물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생각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중간에 항상 어려움이 있었다. 1997년에 다목적 빌딩인 벧엘관을 지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상당히 큰 규모로 시작했지만 함석으로 지으면 돈도 많이 안 들고 작업도 수월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내부시설에 꽤 많은 돈이 들어갔다. 세면장과 화장실도 8개씩 지어야 했고 기도하는 온돌방도 만들어야 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돈이 들어가 중간에 중단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내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완공할 수 있었다. 시작은 쉽게 했지만 과정은 너무나 어려웠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셨다. 나는 벧엘관을 완공한 후 더 이상 시설을 확장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 시설을 늘려가야 했다. 그런데 시설을 늘려놓아도 아카데미는 항상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도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사람들이 몰리지만 그외의 시기에는 아카데미가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한번만 이용해도 사람들이 은혜 받고 돌아가는 시설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졌다.
2000년 봄 잠자리를 불편해 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숙사를 지었다. 까다로운 주정부의 건축규정 때문에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 18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완공했다. 나는 이 건물을 숙소 겸 예배당으로 삼고 이름을 ‘아가페’로 붙였다.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그후 ‘이제는 정말 건물을 그만 지어야지’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나눔을 뜻하는 ‘코이노니아’라는 시설을 건축했다. 이같은 시설을 마련하면서 아카데미는 점차 그럴 듯한 모습으로 탈바꿈 해나갔다. 그러나 나는 시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넘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아카데미를 찾는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맛볼 수 있기를 간구했다. 그같은 기도 덕분인지 아카데미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발전해나갔다. 뉴욕과 뉴저지주 뿐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중고교 시절에 이곳을 찾았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다시 찾아와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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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7)

주위선 “돈 없이 어떻게 학교 세워?”

[국민일보] 2005-04-15 05판 30면 1599자 문화
1년 재미는 농사요,10년 재미는 나무 가꾸는 것이며,평생 재미는 사람 농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삶을 멀리 보기 쉽지 않다. 당장 눈앞의 일을 통해서 희망과 좌절이 교차된다. 그러나 막연하지만 멀리 보는 꿈과 비전을 갖고 살 때 소망이 있다. 맑은 정신으로 갖는 꿈은 결코 악하고 나쁠 수 없다. 누가 감히 먼 훗날 죄악의 꿈을 그리겠는가. 세상에는 잘못된 것이 많이 있다. 그 대부분은 계획된 것이기보다 우발적인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젊거나 늙거나 꿈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에도 소망을 주시고 있다.
내가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시작할 때에도 미약하지만 분명히 꿈이 있었다. 10년의 재미를 주는 나무 가꾸기와 평생 재미를 주는 사람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 농사가 내 평생의 꿈이었다. 그동안 기독교 수양관에 많은 성도가 오가며 영성이 자라며 변하는 것을 보았다. 어렸을 때 학생그룹으로 따라오던 아이들이 벌써 자라서 어떤 이는 교사로,어떤 이는 전도사로,어떤 이는 목사가 되어 오는 것을 보면 기쁘기가 그지없다. 장소와 시설만 만들어 빌려주었을 뿐인데 아카데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미에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키울 수는 없었다.
처음의 꿈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나는 적극성을 갖고 사람을 교육하는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바로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주위에선 격려보다 걱정이 많았다. “재원도 없고 학교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학교를 시작한단 말인가”라고 우려했다. 꿈이 악몽일 때는 그 날로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좋은 꿈은 희미하지만 오래 간직한다. 나는 ‘사람을 키운다’는 좋은 꿈을 가슴에 담고 무조건 밀고 나갔다.
나는 어떤 학교를 세울 것인지를 생각했다. 대상과 과정도 문제였다. 나는 고등학교가 가장 중요한 교육기간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지식을 받아들인다면 고등학교에서는 인성과 영성교육을 받아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물론 더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 교육이지만 고등학교 기간에는 독립된 인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다른 시기보다 더욱 중요하다. 통계상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마약과 알코올,담배 등을 경험하는 것도 이 시기다. 가장 잘못되기 쉬운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된 고등학교를 세워 학생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특히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부어줘 꿈과 비전을 지닌 크리스천 리더로 키우기 원했다. 그들이 참다운 인성과 영성교육을 받아 미래의 지도자가 되어 어둡고 혼탁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은 내 꿈을 가능하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신실하신 분이셨다. 나는 일단 기존의 기독학교를 알아보았다. 우리에게는 장소와 시설 등 하드웨어가 있었지만 커리큘럼과 교사 등 소프트웨어는 없었다. 기도 가운데 학교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뉴저지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연결됐다. 생긴지 2년이 채 안된 학교였다. 학생도 30명에 불과했다. 보잘것 없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연결시켜주신 귀한 동역기관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일할 방안을 마련해나갔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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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8)

기독정신으로 무장한 교사들 ‘큰 힘’

[국민일보] 2005-04-18 05판 35면 1714자 문화 기획,연재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사역에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사람들을 통해서 그분의 위대한 일이 이뤄진다. 위대한 일은 위대한 시설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룩된다.
사실 뉴저지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외견상으로는 초라한 미니학교였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모두 기독정신으로 무장된 분들이었다. 그들은 뜨내기 교사들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정교사 자격증을 지니고 있었으며 대부분 20년 넘게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미국 공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분투,노력하고 있었다. 보장된 교사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홈스쿨링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분들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들을 보고 함께 일할 적임자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야말로 우리가 비전을 공유하며 함께 일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학교임을 직감했다.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철저하게 기독정신으로 무장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했다.
그 학교 선생님들의 자녀들은 일반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했다. 각 교사 출신 부모가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가르치다가 뜻이 맞아 시작한 학교가 바로 유나이티드 크리스천 아카데미였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믿음 안에서 영성과 지성,인성이 조화되는 교육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학력만을 중시하는 일반학교는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었다. 자녀들이 아무리 하버드나 예일대 등 소위 아이비 리그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지성과 영성,인성이 조화롭게 갖춰져 있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20년 이상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린 결론은 바로 철저한 크리스천 교육이었다.
그 선생님들은 그동안 한 침례교회의 교회학교 교실을 빌려쓰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회의 방 4개를 빌려서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협소한 장소에서 마음 먹은 대로 교육이 이뤄지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매일 캠퍼스를 갖춘 학교로 이사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나게 됨으로써 그들과 나의 꿈이 이뤄지게 됐다. 그들에게는 멋진 캠퍼스,내게는 훌륭한 교사들이 생겼다. 물론 문제는 있었다. 당시 내게는 5만여평의 캠퍼스가 있었다. 그러나 수양관 시설이었기 때문에 교실이 없었다. 수양관 건물은 교실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나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무작정 학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다시는 건물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하나님은 내게 또 다시 건물을 짓도록 몰아가셨다. 지난해말 건물이 완공됐다. 나는 봉헌예배를 드리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감사하게도 봉헌예배를 드리는 날 내가 출석하던 뉴저지 연합감리교회의 성도와 친지들,이웃 타운의 주민들이 참석했다. 또 인근 타운의 시장 두 분이 참석해 축사하고 격려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몇번이고 다짐했다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리라. 이 학교는 내것이 아니다. 학교는 하나님의 것이며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의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작했다. 고교과정의 학교였다. 미국 정부가 인정한 학교였다. 사명감 넘치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포진해 있는 멋진 학교였다. 대학시절부터 간직했던 꿈이 이뤄진 것이었다. 미국에서 내가 학교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다보니 어느 순간 꿈이 이뤄져 있었다.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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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저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장 신정하 장로 (9·끝)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예수안경’

[국민일보] 2005-04-19 05판 31면 1685자 문화 기획,연재

 
“두 사람이 똑같은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바라본다.”
랭브리지란 시인의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라는 글의 내용이다. 세상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두 사람이 똑같이 창 밖을 바라보아도 한 사람은 진흙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본다.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지난 시절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의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현실은 혹독했다. 그러면 세상을 밝게 바라보는 것은 힘들다는 말인가?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바로 ‘예수안경’을 쓰는 것이었다. 믿음안에서 순종의 삶을 살 경우에는 세상은 한없이 밝고 즐겁다는 것이 내 인생의 결론이다. 우리가 예수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아무리 거칠더라도 우리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나는 매일의 삶이 기쁘다. 예수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어려움은 닥쳐온다. 어렵사리 크리스천 유나이티드 아카데미 고등학교를 설립했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찾아와서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예수안경을 쓰고 그 어려움을 바라볼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려움이 아니다. 내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일 뿐이다. 삶이 단조롭지 않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에 언제나 감격한다.
나는 크리스천 유나이티드 아카데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멋진 교육공동체로 만드는데 여생을 바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학교,하나님의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학교로 만들 것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 학교를 만드셨고 운영하신다. 나는 예수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멋진 크리스천들로 구성된 운영이사회나 후원회를 만들어 함께 학교를 일궈나갈 계획이다. 지성(IQ)과 감성(EQ),영성(SQ)교육을 통해 크리스천 특수 정예학교를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를 믿음으로 책임 질 수 있는 훌륭한 크리스천 리더를 길러내는 것이 나와 학교의 목표다. 대학시절부터 간직했던 나의 꿈이다.
올해에는 좀더 많은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 그러나 그 수는 100명을 넘기지 않을 생각이다. 그 가운데 한인학생은 30명 이내로 할 계획이다. 한국학생을 많이 선발하면 자칫 미국내 한인학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목표가 소문이 나서 미국의 많은 학생이 경쟁적으로 들어오려는 학교로 만들고 싶다.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될 소수 정예의 한국 학생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인들을 능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이 학교를 하나님께 바쳤다. 학교의 미국인 선생님들도 모두 하나님께 자신들의 인생을 멋진 일에 사용하게 해달라고 서원한 사람들이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나는 믿음의 학교다. 흑인 민권운동가 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내게는 꿈이 있어요”(I have a dream)라고 외쳤다. 나 또한 꿈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애썼다. 멋진 기독교 교육공동체를 만든다는 그 꿈이 이뤄졌다.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고백한다. 할렐루야
(미국 뉴저지 크리스천 유나이티드 아카데미 연락처 609-758-1177, 한국 02-2654-5002)
정리=이태형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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